막내삼촌의 헤드폰..

by 전일도 posted Jun 1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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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에는 노총각이던 막내 삼촌이 함께 사셨죠.


아버지와는 터울이 상당히 컸던 삼촌.. 집안 식구 중 그 누구와도 겸상을 하지 않았다는 초권위적인 할아버지도 늦둥이로 본 삼촌만은 무릎에 앉혀서 밥을 먹였다죠.


나름 국내 굴지의 모 기업 대리였던 삼촌 방에는 신기한게 참 많았습니다. 이런저런 등산장비, 스키장비, 커다란 오디오시스템 등등.. 


저는 언젠가부턴가 하교 후 집에 돌아오면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삼촌 방에 들어가서 어른 남자의 물건들을 구경하곤 했죠.


지금 생각하면 좀 슬픈 이야기지만 말이죠. 나름 넓었던 집에서 엄연히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의 물건 중에 남자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던 물건은 장식장 가득했던 양주콜렉션 밖에 없었으니..


아버지들 화이팅하세요. 각설하고,


삼촌의 소니 티비로 슈퍼볼도 보고 지포라이터도 만지작거리고, 한번은 해외 출장 갔다가 사온 말보로 라이트에 불도 붙여보고.. ㅋ 그런 후에는 모든 물건들을 제자리에 그대로 돌려놓고 제 방으로 돌아가 천역덕스럽게 퇴근하는 삼촌을 맞곤 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좋아했던 물건이 삼촌의 헤드폰이었습니다.


돼지꼬리 케이블이 꽤나 큰 오디오시스템의 헤드폰 단자에 물려 있던 밀폐형 헤드폰. 감히 스피커는 못켜고(어쩌다 켜지만 화들짝 놀라 얼른 헤드폰 단자를 끼곤 했죠) 삼촌 침대에 앉아 그 녀석으로 지금은 누군지도 모른 팝송 CD를 한 삼십분씩 무아지경으로 듣다가 시간이 흐른걸 깨닫고 방에서 나가곤 했죠.


전 밖에서 음악은 헤드폰이 아닌 이어폰으로 듣습니다. 제게 헤드폰이란 집에서 조용히 느긋하게 거치형으로 듣는 물건이죠. 이런 제 스타일을 만든게 어렸을 때 삼촌 방에서의 추억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삼촌이 장가를 가게 되어 독립하게 된 후에도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더군요. (담배로 말보로 라이트에요.. ㅎㅎ)


지금도 사촌들과 어른들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삼촌. 겨울마다 모 스키장에 불쑥 찾아가면 만날 수 있는, 집안 어른이라기보다는 저와 터울 많이 나는 형님 같은 소중한 분입니다. 아직도 작은아버지라는 호칭은 절대 안나오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지금은 진공관 앰프와 빈티지 스피커를 즐기시더군요.


나이 서른을 넘어 서서히 노총각이 되어가는 지금, 호젓하게 헤드폰으로 음감할 때마다 그때 생각이 나면서 격세지감을 느끼곤 합니다. 내가 그때 삼촌 나이가 되었구나...하면서 말이죠. 어쩌면 제가 헤드폰앰프를 자작하는 이유는, 언제까지나 어른이 되고 싶은 어린 아이로 남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이죠..